신변잡기

내가 직면한 화두. 미래에 대한 희망.

티리온 2009. 1. 6. 22:46


1. 나는 '소통'의 한계에 대해 절감한 적이 있다.
한때 나는 나의 '진심'이 타인에게 전해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러한 실험은 실패했고, 인간은 섬이라는 철학의 명제를 절감했다.
누구나 자신의 감각기관을 통해 받아들인 경험과 그것을 바탕으로 형성된 '인식'을 가지고 세상과 타자를 해석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설령 내가 호의를 보여도, 그것이 상대에게는 악의로 다가갈 수 있다는 것을 새삼 깨우쳤다.


2. 역사를 공부하면 할 수록, 인간은 선사시대나 지금이나 본질적인 측면에서는 같다는 생각을 했다.

간단히 말해, 사람들은 '요샌 굶어죽는 사람은 없잖아?'라고 말하지만, 그건 세상을 제대로 보지 못한 어리석음의 소치다. 비율상으로 보면 여전히 굶고 있는 사람들은 존재한다.
한쪽에서는 식량이 썩어가도 다른 쪽에서는 굶어죽는 현실은 수천년간 변하지 않았다.

또한 시간이 흐른다 하더라도 그것이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는 할 수 없다. 기술의 발달이 인류의 진보를 가져다 줄 것이라는 기대는 20세기 동안의 경험만으로도 충분히 깨졌다.


3. 살면 살수록 나는 '죽음'에 직면했다.

인간은 누군가 죽는다는 사실. 누구나 살아가면서 애써 잊으려 하는 사실이 떠오를때마다 나는 짙은 허무를 느꼈다.

죽음 앞에 가치 있는 것이라고는 채 한줌도 안되는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현대사회에서는 가족조차 가치있다고 말하기 어려웠다.
21세기의 한국사회는 전통적 인간관계가 해체되고  '재미와 취향'이라는 화두로 다시 집결되고 있었다. 서로 공감하고 이해할 여지는 고작 유전자의 1/2가 섞였다는 사실 뿐.
그러나 다른 시간과 공간을 살아온 부모세대와 자식은 되려 타인보다 거리가 멀었다.

물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종교에 귀의하면 쉽게 풀린다. 그러나 나에게 그것은 나약한 도피였다. 두려움에 대한 굴복이었다.
인간으로서 가져야할 앎의 의무를 저버리고 스스로 동물로 퇴화하는 역설이었다.


그렇게 나의 이성과 직관은 '인간의 한계'라는 지점에 봉착했다.

하지만 포기할 수 없었고, 곰곰히 생각했다.

언어와 기호를 넘어서는 진정한 의미의 소통은 과연 가능할 것인가?
인류는 현재의 한계를 넘어 진보할 수 있을 것인가?
나는 죽음이라는 종말 앞에서 가치 있는 것을 이루어 낼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이 질문은 다시 하나로 통합되었다.

'초월'은 가능한가?..........

이것이 내가 직면한 화두다. 그리고 그것이야 말로 인류가 도약과 진보를 위해 얻어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