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새는 자주 미국 드라마를 찾아서 보고 있습니다. 유선방송에서도 자주 해주더군요.
그중 재미있게 보고 있는게 바로 '크리미널 마인드'라는 드라마입니다. 


 주요 내용은 FBI의 BAU(행동분석팀)이 정신병적 이상이 있는 연쇄살인범들(주로 사이코패스)을 잡는다는 내용입니다. 현재 채널 CGV에서 4시즌을 해주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4시즌 21화까지 진행되어 있죠.

 이 드라마에 나오는 사이코패스는 단적으로 말해, '공감능력'이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욕구(성욕, 통제욕) 등에 충실해 사람을 죽이는 것까지도 서슴치 않는 부류죠.

 최근 한국 사회에 이슈가 된 '강호순' 같은 사람이 바로 그런 사이코패스입니다. 일반인의 감성과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괴물같은 존재들이죠.

 그렇게 사이코패스에 대한 드라마나 현실속의 연쇄살인마를 보고 있자니, 문득 게임을 하거나 인터넷에서 마주쳤던 악플러들 중에 그런 사이코패스가 있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섬뜩한 생각이 들더군요.

  

 왜냐하면, 필드에서 단순히 자신의 '재미'를 위해 수십번씩 저렙들의 시체를 지키면서 죽이고 또 죽이는 소위 '저렙학살자'들과 이유없이 비난과 욕설을 퍼붇는 악플러들의 행위를 보면, 드라마와 현실에 등장하는 사이코패스들을 보면서 상당한 공통점이 있다고 보이기 때문입니다.

 와우라는 게임을 예로 들어보면, 얼라와 호드는 서로 말이 통하지는 않고, 공격이 가능하지만. 그 캐릭터 너머에서 조작하고 있는 건 우리와 같은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저렙학살자들은 저렙지역을 순회하며 유저들을 '학살'합니다. 아마도 서버마다 그런 저렙학살자로 악명이 높은 얼라나 호드가 꽤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들의 행태를 보면 모니터 너머에는 자신과 같은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비록 진영은 게임사의 설정에 따라 얼라와 호드로 나뉘어 있지만, 그 캐릭터를 플레이하고 있는 것은 사람입니다. 남자일수도 있고 여자일수도 있고, 대학생일수도 있고, 백수일수도 있고, 회사원일수도 있습니다만, 어쨌든 사람이 플레이 합니다.  

그러므로 그렇게 일방적으로 학살을 당하면 당연히 짜증나고 화가 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렙학살자들은 전형적인 사이코패스와 유사하게, 그들의 고통과 분노에 신경쓰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재미만을 위해 저렙들을 학살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거기에 악플러들도 비슷합니다. 악플로 심하게 비난을 당하면, 심한 경우 자살까지 갑니다.

 그럼에도 심한 악플러들은 자신의 재미를 위해 욕구를 가상공간에 토해냅니다. 읽는 이의 감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일방적은 행동이죠. 물론 대부분은 익명성과 군중심리에 따라 움직이지만, 그 선두에는 그 행위자체를 즐기는 사람들도 존재합니다.  

 때문에 저는 문득, 나와 같은 게임을 하면서 나를 학살하거나, 가상공간에서 마주쳤던 이들 중에  사이코패스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끔찍한 상상을 해본겁니다. 

혹자는 "무슨 게임이나 댓글 가지고 끔찍하게 '사이코패스'까지 운운하느냐?"라고 말씀하실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이코패스는 뭔가 특별한 사람이 아닙니다. 정신적으로 공감하는 능력에 '기능장애'가 있는 사람일 뿐이라고 하더군요.

그러니 겉으로 보기엔 일반인과 전혀 구별할 수 없답니다. 게다가 일반인처럼 잘 살던 사람도 어느날 갑작스러운 충격이나 스트레스 상황이 발생하면, 통제할 수없는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마로 변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저는 그런 상상을 해본겁니다.

 당신이 하는 게임속에서도, 당신이 가는 커뮤니티에도, 심지어는 당신이 쓴 글에 댓글을 단 사람들 중에는 사이코패스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덧. 졸지에 납량특집?
덧2.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지는 마세요~ ^^;;

Posted by 티리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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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적 유전자를 보고 벼르다가 드디어 "만들어진 신"을 사서 보았다.
책이 제법 두툽한 탓에 대략 6시간 정도 걸린 것 같은데, 한 번에 주욱 술술 읽혔다.

주요 논점은 사이비 과학인 '창조과학'에 대한 비판, 도덕과 종교의 관계, 종교의 폐해 등에 대해서 논했다.

평상시 나의 논지는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는 강경한 쪽이기에 전반적인 주장 자체에는 동감이었다.
다만, 그 논거와 설득력이 '이기적 유전자'보다는 좀 약했다는 느낌이었다.

그건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는데, 우선 나의 사상적 배경에는 불교철학이 들어있다는 거다.
특히 선종(禪宗)에서는 '깨달음을 위한 수행'중에 일어나는 온갖 망상을 배제하고 오로지 궁구(窮究)할 것을 강조하면서 "스승을 만나면, 스승을 베고,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베어라!"라고 가르치는 종교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깨달음'이고, 그것은 남이 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이루어내는 인식의 거대한 전환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서양 유일신 신앙(유대교, 카톨릭, 이슬람)을 배경으로 성장한 서양 독자들과 다르게 되려 '만들어진 신'이 상대적으로 온건하게 느껴졌다.

그렇기에 한국에서는 '만들어진 신'이라는 책이 그다지 논쟁이 안되는 것일 터다.
한국의 종교토양이 그들과 다르기에.


아무튼 나도 신은 만들어졌다는 점에 대해 동의한다.
신은 인간의 발명품이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종교란 죽음을 두려워한 비겁자들이 만들어낸 자위용 변명이다.

그리고 그 근원에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대부분을 차지한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의식이 눈을 뜬 순간부터, 타인의 죽음을 보며 자신의 죽음을 생각했을 것이고, 그것을 두려워하며 그 너머를 궁금해 했을 것이다.

나는 그것이 종교를 탄생시킨 원동력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신은 없고, 인간의 사유만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Posted by 티리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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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는 '소통'의 한계에 대해 절감한 적이 있다.
한때 나는 나의 '진심'이 타인에게 전해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러한 실험은 실패했고, 인간은 섬이라는 철학의 명제를 절감했다.
누구나 자신의 감각기관을 통해 받아들인 경험과 그것을 바탕으로 형성된 '인식'을 가지고 세상과 타자를 해석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설령 내가 호의를 보여도, 그것이 상대에게는 악의로 다가갈 수 있다는 것을 새삼 깨우쳤다.


2. 역사를 공부하면 할 수록, 인간은 선사시대나 지금이나 본질적인 측면에서는 같다는 생각을 했다.

간단히 말해, 사람들은 '요샌 굶어죽는 사람은 없잖아?'라고 말하지만, 그건 세상을 제대로 보지 못한 어리석음의 소치다. 비율상으로 보면 여전히 굶고 있는 사람들은 존재한다.
한쪽에서는 식량이 썩어가도 다른 쪽에서는 굶어죽는 현실은 수천년간 변하지 않았다.

또한 시간이 흐른다 하더라도 그것이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는 할 수 없다. 기술의 발달이 인류의 진보를 가져다 줄 것이라는 기대는 20세기 동안의 경험만으로도 충분히 깨졌다.


3. 살면 살수록 나는 '죽음'에 직면했다.

인간은 누군가 죽는다는 사실. 누구나 살아가면서 애써 잊으려 하는 사실이 떠오를때마다 나는 짙은 허무를 느꼈다.

죽음 앞에 가치 있는 것이라고는 채 한줌도 안되는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현대사회에서는 가족조차 가치있다고 말하기 어려웠다.
21세기의 한국사회는 전통적 인간관계가 해체되고  '재미와 취향'이라는 화두로 다시 집결되고 있었다. 서로 공감하고 이해할 여지는 고작 유전자의 1/2가 섞였다는 사실 뿐.
그러나 다른 시간과 공간을 살아온 부모세대와 자식은 되려 타인보다 거리가 멀었다.

물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종교에 귀의하면 쉽게 풀린다. 그러나 나에게 그것은 나약한 도피였다. 두려움에 대한 굴복이었다.
인간으로서 가져야할 앎의 의무를 저버리고 스스로 동물로 퇴화하는 역설이었다.


그렇게 나의 이성과 직관은 '인간의 한계'라는 지점에 봉착했다.

하지만 포기할 수 없었고, 곰곰히 생각했다.

언어와 기호를 넘어서는 진정한 의미의 소통은 과연 가능할 것인가?
인류는 현재의 한계를 넘어 진보할 수 있을 것인가?
나는 죽음이라는 종말 앞에서 가치 있는 것을 이루어 낼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이 질문은 다시 하나로 통합되었다.

'초월'은 가능한가?..........

이것이 내가 직면한 화두다. 그리고 그것이야 말로 인류가 도약과 진보를 위해 얻어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Posted by 티리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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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살이 되었고, 이제 그 서른살의 해도 저물고 있다.

언제나 영원할 것 같았던 나의 젊은 날도 저물고 있다. 
부끄럽고 억울하다.


부끄러운 것은 서른 살이 되도록 아무 것도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다.

물론 사람이 태어난 이상 언젠가는 죽기 마련이다.
그리고 죽음 앞에서는 돈도 명예도 권력도 아무런 가치가 없다.

그렇다고 해도, 이루어놓은 것이 없는 내 자신은 부끄럽다.


억울한 것은 내가 아무것도 그게 내 탓이 아니기 때문이다.

97년 IMF. 그리고 도래한 힘든 10년. 어설피 흘러간 그 시간들.
선배들과 달리 나는 대학생활의 낭만도 없었고, 명문대 프리미엄도 누리지 못했다.

그리고 2007년. 다시 한나라당과 츠기야마 아키히로(한국명 이명박)이 집권한 현실.
그리고 그 이면의 모순구조와 꿈도 희망도 없이
그저 하루 세끼 밥에 목매달고 허덕이게 만드는 현실.

그렇기에 억울하다. 지금의 내 모습이 온전히 내 잘못이 아니라는 것이.

부끄럽고 억울하다.

Posted by 티리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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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대일지 xx년 10월 6일 월요일 맑음

병장 김아무개가 3일째 제초작업 지시를 무시하고 맥심을 껴안은채
보일러실에서 자고 있기에 끌어다 베었다.

상병 최아무개와 일병 이아무개가 경계근무지에서 몰래 담배를 피우다
적발되어 이 역시 참수하려 하였으나 주변에서 만류하므로 곤장
50대를 때렸다.

하사 장아무개가 분대 관리는 하지않고 날마다 찾아와 휴가를 청하므로
곤장 30대를 때려 철원으로 전출보냈다. 군관된 자가 일신의 이득만
꾀하고 있으니 통탄할 일이다.

부대일지 xx년 10월 7일 화요일 맑음

아침에 대대장이 와서 행보관들을 모아놓고 병력의 8할이 휴가 및 부상, 혹은 일이등병이라
이번 추계진지공사는 파토났으니 일찌감치 기권하고 사단에 사정을 헤아려달라
청함이 어떠냐 하였다. 이에 내가 나서서,

"신에게 아직도 삽 12자루와 상병장 열두마리가 있사옵니다. 놈들이 죽기로 삽질을 하고자 하면
살것이고 짱박혀 쉬고자 삽을 놓으면 죽을 것이니 이와같은 각오로 삽질하면 안될 것이 없소이다."

라고 고하고 또한,

"신의 야삽이 번뜩이는 동안은 감히 상병장들이 짱박히지 못할 것입니다."

라고 하니 대대장이 진지공사 속행을 허가하였다.
상병장 열두마리를 몰고 뒷산에 올라 한창 삽질할 때 병장 안아무개가 품에서 맥심을 꺼내들고
오른팔 근육을 불뚝이며 숲속으로 숨으려 하였다. 이에,

"네 이놈 안가야, 네가 군법에 죽고 싶으냐?네가 오늘 삽질을 아니하고 도망가서 어디에서 살것이냐?"

하니 안아무개가 돌아와 나머지 상병장들을 다그쳐 죽기로 삽질을 하였다.
해질녘이되니 뒷산 200고지가 평지로 바뀌었다.

행보관은 육군의 주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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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렇게 보면 이순신같은 상급자 안만나는게 좋을지도.. -_-;


추가) 사단장의 나무.. ㄷㄷ




Posted by 티리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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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 심난한 마음에 글을 써봅니다.

물론 여기서 '우리'란 금융자본도, 토지자본도 없어서, 내 노력과 시간(노동력)을 팔아 돈을 벌어 먹고 살아야 하는 일반 서민을 뜻하죠.


그런데 점점 세상은 암울한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과학과 기술의 발전으로 이제 직접적인 노동력 없이도 엄청난 생산력을 발휘하고 있고,
노동력이 필요한 산업도 값싼 노동력이 널려있는 제3세계 개도국으로 공장들이 나가고 있습니다.

그간 한국 경제를 키워온 수출주도형 경제성장을 유지한다 하더라도, 대기업에는 이익이 되지만, 점점 집중화되는 자본과 기술 때문에 우리에게까지 그 이익이 돌아오지 않습니다.

거기에 서비스업도 포화상태죠. (IMF 때 명퇴한 수많은 이들이 자영업(서비스업)에 뛰어들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말아먹었죠.)

이런 현실들은 노동시장을 악화시켜, 더욱 처절한 경쟁을 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게다가 2mb는 FTA와 '총출제 폐지', 종부세 완화 등 규제를 철폐하고 '법'을 바꾸면서 한국사회를 점점 1%를 위한 국가로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즉, 일반 직장인을 착취해 1%에게 이익을 돌리는 많은 정책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의료보험 민영화, 공기업 민영화 등이 바로 그런 것들이죠.


문제는 이런 경향은 점점 심해질 것으로 생각됩니다.

게다가 이미 우리나라는 급격한 노령화를 눈 앞에 두고 있습니다. 준비되지 않는 채 맞이하는 노령인구 '폭탄'은 사회를 어떻게 변화시킬지 모릅니다.

지금 상황에서는 서로 말이 통하지 않아 일어나는 노소(老少) 갈등과 더불어, 노인층이 극빈층으로 전락하는 세태, 그리고 젊은 이들은 그런 미래를 두려워하며 더욱 악착같이 살아야 하는 세상이 될 것 같기도 합니다.

그래서 더 각박해지고, 흉험해 질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정말 '정치적 혁명'이 일어나 대한민국이 싹 바뀐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미국-일본의 영향에서도, 중국의 영향에서도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그 누구도 남북이 합쳐지기를 바라지도 않을 테고, 자기네들 꼬봉(친미 애널서커, 친일반민족 부역배, 친중 북한 정치군인 등)이 실권하는 것도 원치 않을테니까요.

결국 3일천하로 끝나고 외국군대의 진주와 더불어 1896년(갑오동학농민운동과 청일전쟁)의, 1945년(8.15 해방)을 반복할지도 모릅니다.

게다가 이미 노무현 시절 봐왔듯, 정부는 더 이상 자본을 이기지 못합니다. 우리나라가 규제를 엄격히하면, 자본은 다른 곳으로 떠나버리면 그만입니다.

그렇게 돈이 빠져나가버리면, 한국의 경제는 더욱 침체되겠죠.

이렇게, 제 수준에서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우리의 미래는 암울합니다.
제가 미흡하고 비관적이어서 그런걸까요? 아니면 현실은 시궁창이라 어쩔수 없는건가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1960년대, 1970년대 우리의 아버지 어머니가 '잘살아보세'를 외치며 희망을 품고 살아왔지만, 막상 도달한 2000년대는 이토록 암울합니다.

과연.. 우리는 어떤 희망을 품고 미래를 기다려야 하는 걸까요?

Posted by 티리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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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질.

저는 회사 취직하고 1년이 지난 시점에서 처음 들었습니다.
맨 처음에는 무슨 뜻인가 했습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우리나라에서 계약관계는
갑(甲)과 을(乙)로 표현됩니다.

그리고 대체로 '갑'이 권한을 가지죠. 주로 돈 주는 쪽이 갑입니다.
그래서 이들이 그런 권한을 상대로 '을'을 마구 부려먹는걸 '갑질'이라고 하더군요.

때문에 갑을관계는 군대 고참-후임보다 더 더러운 관계입니다.
고참-후임 관계는 열받으면 소원수리 같은 제도도 있고, 길어야 2년만 버티면 끝나는 관계입니다. 물론 내가 선택할 수 없다는 단점이 있죠.

하지만 갑을관계는 선택에 의한 관계지만, 을이 '일방적'인 약자입니다. 어디다 하소연 할데도 없습니다. 그 계약이 파기되면 큰 손해이기 때문에 계약 완료까지 굽신거려야 합니다.  종종 계약외의 일들을 떠맡아야 하는 경우도 많죠.

대기업-하청업체
공무원-용역업체
사장-종업원

요게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갑-을'관계입니다.  차라리 의뢰인-전문가 관계는 평등한 관계입니다.
대기업은 자본과 조직의 힘으로 갑질을 하고, 공무원은 예산을 가지고 갑질을 합니다. 사장은 월급을 가지고 갑질을 하죠.

하지만, 이런 '갑질'은 근본적으로 무소불위의 권력처럼 인식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법치국가에서 계약은 법보다 하위입니다. 때문에 많은 종류의 '갑질'은 불법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나라의 법이라는게 그렇게 정의롭지 않기 때문에 '갑질'이 광범위하게 우리 사회에 퍼져있다고 생각합니다. 법에 호소하기에는 비용과 시간의 문제가 있는데다가, 거의 그 관계를 끝장낼 각오를 하지 않는 한 어렵죠.

더럽고 치사해도 먹고 살아야 하니까요.

그런데 더 웃긴 것은 을의 위치에 있다가 갑으로 옮겨가면, 더 갑질 해댄다는 겁니다. 시집살이도 당해본 사람이 시킨다고, 정말 웃기는 일입니다.

그저 갑질이라는 말을 안들을 수 있는 그런 나라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Posted by 티리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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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보니 일요일 오후에 출근해서 월요일 새벽(...)에 퇴근을 했습니다.

쩝.

그리고 돌아오는 길의 지하철.

대략 시간은 6시 20분쯤 되었던 듯 하군요.

의외로 사람이 많았습니다.

큰 의자 6개와 작은 의자 3개(나머지 1개가 들어갈 공간은 휠체어용 빈공간입니다.)
거기에 듬성 듬성 20여명의 사람들이 앉아 있었습니다.

그중 목표가 뚜렷한 사람은 딱 두사람이었습니다.

예비군 훈련 가는 예비군과 신문지 수거하시는 분.

아. 한명 더 있군요.
바로 퇴근 하는 저 -_-;;;;

아무튼 다들 아침 일찍부터 어디론가 가고 있었습니다.
아마 일하러 가는 길이거나, 저처럼 퇴근하는 길이겠지요.

물론 저에게 그 분들은 그저 스쳐가는 사람들일 뿐입니다.
하지만 그 분들 자신들은 스스로의 인생을 살아가는 분들이겠지요.

그들의 입장에서는 제가 그저 '스쳐가는 지하철의 행인 1' 일테구요.

그런 생각이 들때마다, 참 이세상이 신기하게 느껴집니다.
고작 저는 제 감각, 제 인식, 제 의식의 틀에 갇혀 살뿐,
그 너머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죠.

그런 걸 느낄 때마다, 세상의 신비와 복잡함과 다양함, 그리고 보편성을 어렴풋이나마 느끼곤 합니다.
(제가 생각해도 좀 보통놈은 아니죠.)

아마 피곤하지만 더 신경이 예민해져 있는 탓에 평상시에 인식하지 못했던 것을 인식 했을수도 있겠군요.

아무튼, 집에 들어와 잠들기전 글을 남겨봅니다.


덧. 예비군들.. 불쌍합니다. 오늘 비도 오는데.. 요새는 예비군 훈련도 빡세져서
비오면 우비 입고 합니다. 안습입니다. ㅜㅜ
제발 그런 사람들보고, "가서 쉬다 오는 거 아냐?"라는 말은 하지 말아주십시오.
특히 여성분들.. "여자가 어디서 운전이야?" "여자는 집에서 밥이나 해!" 같은 말을 들으면 상처입는 것처럼 남자들도 그런 이야기 들으면 울컥한답니다. ㅡㅡ;;;;

안그래도 가기 싫은 군대 끌려가서 고생했는데, 제대하고나서도 몇년씩 꼭두새벽에 일어나서 다니려면 무척 짜증나거든요.

부디 배려를... ㅋ
(사실 그분들 때문에 이글을 쓰는지도. 그 지하철 안에서 목적이 가장 확실했....)


Posted by 티리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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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의 남한산성을 읽고 있다.

김훈은 다들 알다시피 칼의 노래로 유명한 사람이다. 문장력이 죽인다. 소설인데도 시쓰는 것 같은 은유와 비유가 많다.

남한산성도 마찬가지.

근데 이게 좀 뭐랄까... 나에게는 향신료가 가득 쳐진 음식을 계속 먹는 느낌이다.

칼의 노래는 정말 신선했었다. 은유와 비유로 가득차 몽환적인 느낌의 문체는 이순신의 심적 갈등을 잘 표현하고 있었다.
그러나 현의 노래는 안봤으니 모르겠고, 남한산성을 봤는데, 여기서도 그러한 문체가 필요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예술과 미학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어디까지나 예술은 해석하는 자의 몫이라고 한다.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는데, 어떤 현대 미술가가 그냥 화장실용 양변기를 사다가 제목을 붙어 미술전에 출품했고, 극찬을 받았다고 한다. 즉, 예술은 받아들이는 사람의 해석 문제라는 것을 통렬하게 지적한 것이라고 한다.

마찬가지를 김훈의 소설에 적용한다면, 구태의연한 역사소설에 문학적 감수성을 불어넣어, 임진왜란 당시의 이순신의 심정을 잘 표현했다고 본다.
 그러나 그것이 계속 반복되니 영 질린다.

그래서 생각해보면, 소설로 예술적 가치를 추구할 수도 있겠지만, 그 기본에는 몰입과 감동, 재미가 있어야 한다는게 내 생각이다.
 문장은 굳이 화려하지 않아도 된다. 정확하고 깔끔한 묘사와 서술을 사용하는 문체로도 충분히 몰입과 감동, 재미를 줄 수 있다고 본다.
소설의 주요 3요소는 인물, 사건, 배경이지, 문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공감할 수 있는 인물, 몰입할 수 있는 배경, 긴장감을 주는 사건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읽는 사람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예술로 승화될 수 있다고 본다. 특히 많은 사람들이 천시하는 무협과 환타지 같은 장르문학에서도 나는 예술의 경지로 승화되어 감동을 주었던 소설을 몇편 보았다.
최후식의 '표류공주'나 김철곤의 '드래곤레이디' 같은 소설 말이다. 또한 철학적 접근을 통해 깊이 있는 생각을 하게하는 소설도 보았다. 이영도의 '드래곤 라자'나 박인주의 '희망을 위한 찬가' 같은 소설들이 그렇다.

또한  OSMU 라는 측면에서 활용될수 있는 것은 스토리이지 문체가 아니다. 문체는 오로지 소설에만 봉사할 뿐이다. 그런 면에서 문체에 집중하고, 단편, 중편 소설에 치중하는 현대 한국 문학계는 스스로 굶어죽기를 자초한 것과 같다고 본다.
 소설은 예술이기 앞서, 재미가 있어야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배운 사람이라면 많은 사람들과 소통해야할 의무가 있다고 본다.

고로 소설은 재미와 대중성을 지향해야 한다.

그게 내 생각이다.

Posted by 티리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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